천하무쌍의 복지(福地) 만수동(萬壽洞)

글 : 이산인 : 르포작가
우리 나라에서 제일 가는 무릉도원은 어디일까.
전해오는 옛 문서나 전설에 의하면 우복동, 청학동과 함께 만수동을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그곳은 전쟁과 기근 명화가 미치지 않는 하늘이 내린 복 받은 땅이라는 것이다.
중국 도담에 '중국의 도사들은 조선에 가서 금강산을 구경하고 청학동이나 만수동에 가서 사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라고 했을 정도로 선망의 땅이었다.
청학동은 지리산 어딘가에 있다고 했고 우복동은 용유리 근처라 했는데 만수동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만수동은 속리산의 남쪽 기슭 증항 근처라는 설도 있고 속리산 천황봉 아랫마을인 묘막골의 옛 이름이 만수동이라는 설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속리산은 동쪽의 복지 우복동과 함께 천하무쌍의 명당을 두 개씩이나 품고있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속리산을 자하산이라고 불렀다.
자하란 보랏빛 노을이라는 뜻인데 보랏빛 노을은 실재하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적인 것이다.
그처럼 자하산은 실재하면서도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갈 수 없는 산이다.
따라서 자하산은 이 땅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초월계다.
지리산에 있다는 전설적 동네인 청학동처럼신선들만 모여 사는 세계며 또한 신선의 경지에 오른 성자들만 드나들수 있는 선계의 땅이다.
그 선망의 땅 자하산이 과연 실재하는 걸까.
옛 사람들은 왜 속리산을 자하산이라고 불렀을까.
1,200년 전 신라시대의 도사였던 최치원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지리산 어디서인가 학을 타고 다니는 것을 봤다는 기록이 있고 민수동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다.
그 최치원이 속리산에 와서 일갈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멀리 않는데
세속은 산을 멀리하는구나.
사람이 산을 멀리한다?
이 말은 무자비하게 산을 파헤치고 자르고 하는 강팍해진 요즘의 인간행태를 그대로 꼬집는 것 같아 뜨끔해지지만 그와는 반대로 산과 더불어 산을 사랑하며 산을 닮아가려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많다.
어느 여름날 보따리를 들쳐 메고 무작정 속리산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마치, 사람들이 도와 산을 멀리한다는 최치원의 주장을 거부하고 몸소 체험이라도 하려는 듯이…….
언제나의 여행 형태가 그러했듯 특별한 목적지나 일정표도 없이 느닷없이 감행한 것이었기에 변변한 반찬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쌀과 술 그리고 얇은 홑이불이 거창한 여행의 모든 장비였다.
일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거의 닿지 않은 산 속 깊숙한 곳에 도착했을 때는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잠자기에 적당한 터를 허겁지겁 찾고 나니 주위는 깜깜한 밤중이었다.
한여름 삼복더위의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산 속의 밤은 추웠다.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고산지대 특유의 냉랭한 기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추위 때문에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폈다. 불빛을 보니 추위와 긴장감이 한결 풀어졌다.
소주병을 하늘로 뒤집었다.
'탁탁' 소리내며 타오르는 모닥불과 매콤한 연기, 숲 속 특유의 냄새, 쓴 소주냄새 등이 혼합된 채 몽롱한 상태로 서서히 잠겨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을 꿨다.
악몽이었다.
어깨와 등허리가 으슬으슬 추워왔다.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을 덮었으나 이번엔 정강이가 시려왔다.
새벽 2시 모닥불은 하얗게 사위어버렸고 잠결에도 추위를 느꼈는지 밤이슬이 내려 눅눅해진 이불 귀퉁이가 불에 타서 쪼그라들었다.
'텐트도 없이 산 속에서 자다니, 미쳤군 미쳤어' 하며 독백을 해보지만 입안에서만 맴도는 웅얼거림이었다.
누운 채로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 되는 먹물 같은 밤이다.
풀벌레 소리도 새들의 지저귐도 나무잎새의 떨림도 일순간에 정지한 듯한 깊고 깊은 심연의 침묵이 흘렀다.
태초의 정적이 이런 것이었을까. 혹시 내가 잠든 사이세상만물이 내 곁을 떠난 건 아닐까.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가슴 절절한 이 외로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온갖 잡념과 궁상스런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얼마 전 아는 친지로부터 들은 얘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 친지가 서울의 내로라 하는 부자동네인 ○○동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단다.
이사간 집은 대지가 삼백 평이나 되는 커다란 저택이었는데 몇 년째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비워 두어서 넓은 정원에 잡초만 무성한 폐가였다고 한다.
전셋값도 너무 터무니없이 싸서 의아해 하자 복덕방 영감의 설명이 있었다.
집주인은 몇 년째 외국생활로 인해 집을 비워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근처 이웃집 사람들이 흉가같이 보인다고 자주 항의를 해오자 집을 팔려고 내놨다고 한다.
그러나 집의 덩치가 큰 만큼 액수도 워낙 많아 마땅한 매입자가 나서지 않자 할 수 없이 주변의 눈총을 무마하는 셈치고 싼값에 세를 놓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느 비오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마당의정원 근처에서 생면부지의 중년여자가 천천히 거닐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마치 등불이 바람에 일렁이듯이 천천히 마당을 배회하는 것이었다.
대문은 굳게 잠겼고 담장은 성곽처럼 높다란데 어떻게 저 여자가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혹에 말을 걸려 하자 여자가 얼굴을 돌려 친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너무도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단다.
여자는 생머리의 단발에다 귀부인 같은 외모를 풍겼으나 얼굴에 분을 발랐는지 새하얀 백지장 같았고 입술엔 시뻘건 루주를 칠했으며 붉은 핏빛의 광기를 떤 눈동자로 친지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놀란 친지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단다.
꿈.
그랬다.
꿈이었다.
그러나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한 여운이 남는 꿈이었다.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친지는 그날 밤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친지는 다시 꿈을 꿨다.
예의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 마당의 정원을 천천히 왔다갔다했다.
그런데, 몸통은 어둠 때문인지 보이지 않고 머리부분만 어둠 속에서 크게 클로즈업되어 마치 물에 떠 있는 부평초같이 보였다.
새하얀 얼굴에다 핏빛의 눈동자가 너무도 선명해서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또렷이 기억될 정도였다.
그 후로 밤마다 불면증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그 집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허겁지겁 이사를 했다고 한다.
이 밤, 이런 곳에서 왜 그런 으스스한 기억들만 되살아나는지 모르겠다.
손을 이불 바깥으로 빼내 머리맡 어딘가에 뒹굴고 있는 소주병을 잡았다.
모로 누워 술병을 뒤집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살아 있는 생물의 소리가 모기소리만큼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뒤집던 술병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개 짖는 소리…….그랬다.
개 짖는 소리였다.
그것도 수십 리 바깥 사람이 살고 있는 어느 집에서 들리는 소리.
홀로 깊은 산 속 한밤중에 듣는 그 소리는 진정 반가운 삶의 소리였다.
그래!
이 세상엔 나 혼자가 아니야.
나와 같이 숨을 쉬고 사고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에 있어. 가슴 저 밑바닥에서 희망의 불빛이 반짝이는 듯했다.
다시 한번 반가운 그 소리가 들릴까 귀기울이다가 그냥 그렇게 잠이 들었다.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산새소리와 벌레들의 날개짓 소리에 눈을 뗬다.
으스름한 안개 속에서 녹색의 나뭇잎들이 미풍에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아! 살았다!
고독과 외로움과 어둠만이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세상에 다시 새날이 밝은 것이다.
몸은 천근같이 무거웠고 목이 말랐지만 굼벵이처럼 몸을 굴려 일어나 앉았다.
새벽의 추위 속에 밤이슬이 내려앉은 풀숲 그리고 술병과 담배꽁초와 타다 남은 나뭇가지들이 살벌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어지럽게 엉킨 채 널부러져 있어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담배를 삐어 물고 용감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런데 기가 막힌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평평하고 제일 좋은 자리를 고른다고 고른 자리가 바로 묘터였던 것이다.
묘는 이장을 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듯 억새풀 속에 작은 낙엽송이 듬성듬성 심겨 있었고 동그스름했을 봉분도 평평해진 채 내가 밤새도록 오들오들 떨며 악몽을 꾸었던 그 자리는 관이 안치되었던 자리였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끝이 하늘로 뻣뻣이 솟아올랐다.
허겁지겁 주변에 널려있던 짐들을 대충 챙겨 넣고 부랴부랴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그 끔찍스런 기억들이 한때의 아스라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할 즈음해서 다시 속리산을 찾았다.
이번엔 천하의 복지라고 옛날부터 소문이 났던 만수동을 찾아가는 길이니 만큼 다소 느긋하고 기대감을 갖는 여행길이었다.
「정감록」비결을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는 삼가리 골짜기를 찾아가는 길은 산고개를 꼬불꼬불 올라가야 하는 고된 여로였지만 숲 속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친구 삼아 지루한 줄 모르고 가는 길이었다.
고갯마루에 올라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첩첩산중 속에 파란 호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림엽서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호수다.
삼가호수는 수십만 평의 깊은 골짜기에 둑을 쌓아서 수심도 깊고 저수량도 많다.
옛날 이 호수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천하무쌍의 대지 우복동이라는 전설을 믿고 들어온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필자가 추측하건대 우리나라 전체저수지 가운데 최고의 청정 지역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곳을 첫 손으로 꼽아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물이 맑고 차다.
그래선지 메기, 잉어, 붕어 같은 담수어는 어지간한 낚싯대로는 건져 올리지 못하고 낚싯대가 부러질 정도로 힘이 좋다고 한다.
해동 무렵인 삼월 초순에 플라스틱바가지 한 개를 준비해 가면 횡재를 하는 수가 있다.
이때는 빙어의 산란시기여서 빙어가 저수지에서 개울상류의 자갈 속에 알을 낳으러 올라가는 시기인데 떼지어 올라오는 빙어 떼의 장관을 볼 수 있다.
고기들은 알을 낳은 후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이때바가지로 퍼 담기만 하면 된다.
빙어는 냉수어 쪽으로 흰빛의 비늘에 속이 내장까지 훤히 비친다고 할 정도로 깨끗한 일급수에만 사는 피라미 크기의 물고기다.
빙어는 내장을 따지 않고 회를 먹는데, 소주 한잔 걸치고 먹는 빙어회는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거기에다 이곳에서 서식하는 민물새우에 고추장을 화끈하게 풀어 끓인 매운탕까지 곁들인다면 내장에다 영원한 감동을 줄 것이다.
삼가호수를 끼고 난 산길을 한 바퀴 돌아가면 구명산 아랫동네가 나온다.
노송숲을 지나 언덕빼기에 자리잡은 마을은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장수촌 마을인 구병리 동네다.
95세의 송영봉옹은 지금도 쌀 한 가마니를 거뜬히 지고 일어선다.
주민 수라야 60여 명의 작은 산골마을이지만 그 중 칠순노인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팔순 이상도 열 명이나 된다니 가히 장수촌의 명성이 헛말은 아닌 것이다.
필자가 장수의 비결을 묻자,
"뭐 특별한 게 있겠나,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잠을 충분히 자고 자연에 순응하며 즐겁게 사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지"
하신다.
옛날 이 마을은 '천하의 복지'라는 비결서를 보고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이뤄진 마을이었다는데 그 당시에는 화전을 일궈서 생활했으나 지금은 영지버섯, 흑염소, 토종벌 등을 쳐서 생활이 한결 나아졌다고 한다.
만수동 가는 길은 삼가호수를 거쳐 좁은 골짜기 한가운데로 나 있는 개울을 따라 그 골짜기 막장까지 가야한다.
계곡의 수심 깊은 여울도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데 계곡은 깊고 오염의 주범인 인간들의 발길이거의 닿지 않은 탓이다.
무주공산의 골짜기는 산수 또한 빼어나 편안하고 느긋하게 자연과 내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쾌적한 백팩킹코스로 손색이 없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길을 십 여리 걷다보면 만수동 초입인 동구밖 당산나무에서 일단 멈춘다.
아름드리 산벚나무와 전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돌탑에 둘러싸여 있고 횐 창호지를 매단 새끼줄이 이끼 낀 돌탑에 구렁이 감기듯 칭칭 감겨 있다.
하늘만 빠끔히 보이던 골짜기가 이곳부터 활짝 트여지고 천황봉을 정점으로 한 속리산 줄기가 가마솥같이 생긴 분지 안을 사방에서 호위하듯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십승지로 지정된 곳의 마을 터를 보면 호리병의 목같이 좁은 골짜기를 지나고 산들이 겹겹이 둘러쳐진 분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곳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 김형오(43세)씨는,
"이곳 만수동 마을의 유래는「정감록」이나 기타의 고대예언서에서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의 땅이 이곳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고, 옛날 이곳에 만수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선지 지금도 밭이나 산기슭에서 깨진 빗살무늬 기왓장을 흔하게 볼 수 있지요"
라고 소개한다.
"여덟 가구가 살고 있는 만수동은 얼마 전까지 묘막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지금은 원래 이름인 만수동을 되찾았습니다."
묘막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그럴싸한 연유가 있다.
이 근처에 49명의황제가 날 묘터가 있다는 어떤 비결서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상제봉조형이라는 천하의 대명당이 있는데 그 혈이 속리산 남쪽 5리인 이 부근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천황봉의 산줄기 하나가 용틀임하며 내려오다 마을 앞 양쪽 물줄기 앞에서 우뚝 멈췄다.
명당 터가 되는 산을 보면 그림에서 보듯이 대부분 양수머리 부근이 많은데 양쪽의 물줄기로 산의 기운을 가두어 맺히게 하고 그런 곳에 명당 터가 많다.
만수동 앞산이 그런 형국인 것이다.
바로 이 산 위에다 어떤 사람이 묘를 쓰고 난 뒤 명당 터에 묘를 쌌다 해서 묘막골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10월 말경.
단풍이 최고의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워낙 궁벽한 곳이라 아직도 몇십 년 전의 옛날 분위기가 풍기는 고즈넉한 마을의 어느 한 집 돌담아래에는 보라색 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마을은 쥐죽은듯이 적막감에 싸여 있었다.
돌담장 너머로는 벌써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천황봉 꼭대기와 아득히 밀리 보이는 비취빛 파란 가을하늘이 멋진 배경으로 깔려서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가 되었다.
만수동에서 천황봉 오르는 길은 민가 한 채 없는 개울 따라 난 오솔길을 걸어야 한다.
사실 이곳은 전에 꽤 여러 번 혼자서 여행을 한 적이 있는 구면의 길이었지만 이 만추의 계절에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는 건 언제나 가슴 울렁거리는 감동을 주고 있다.
봄날의 찔레꽃향엔 봄의 약동이 배어 있듯이 들국화 향기 속엔 은은하고 스산한 가을이 녹아 있다.
이 가을날 이 아름다운 길에서 들국화 향기를 맡으며 걷는 행복을 어디에다 비유할 것인가.
메뚜기들이 이리저리 뛰어오르는 오솔길엔 이름 모를 보랏빛 들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고 키만큼 자란 갈대숲을 헤치고 한없이 걸을 때 따사로운 햇살과 수런수런 속삭이는 갈대잎의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
숲에 가면 나무들이 두런두런 얘기하는 걸 들을 수 있다고 말하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때 그것이 관념에 묶인 사람의 추상적인 언어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계곡이나 산길을 오랜 세월을 두고 홀로 걷다보니 그것이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서만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인적 없는 호젓한 산길을 무념의 상태로 걷다보면 떨어진 낙엽들의 얘기들과 바람결에 전해주는 나무들의 소곤거림을 들을 수 있다.
지금, 곱게곱게 물든 단풍잎과 붉나무 잎새들이 점점이 여울 위에 내려앉아 물결을 따라 조용히 맴돌고있고 그 아래엔 버들치 떼가 인기척에도 놀란 기색 없이 한가롭다.
3km의 평탄한 이 잔디밭길을 어떤 아랍산 카펫과 비교할 것인가.
가곡이라도 한 곡 흥얼거리면서 걷고 싶은 어여쁜 길이다.
양쪽 계곡의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숲에는 냄새가 있다.
꽃향기처럼 달착지근하고 말초적인 향기보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상큼하고 시원하게 해주는 쌉싸래한 향기가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옷자락에선 그 냄새가 배어 있어 왠지 신선해 뵌다.
천황봉 정상에 서면 아래로 보이는 색색깔의 단풍들이 무리 지어 물든 걸 보면서 아! 하는 감탄사를 또 한 번 외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어느 화가가 저토록 밝고 아름다운 색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설악산과 내장산의 단풍이 비록 좋다고들 하지만 난 아직 이 천황봉에서 내려다보는 저렇게 화려하고 장엄한 색채의 단풍을 기억하지 못한다.
조선시대에는 속리산을 팔경으로 꼽았고 신라 때는 오악(하늘에 제사지내던 다섯의 성스러운 산)인 중악으로서 나라에서 천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했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천황봉에서 상환암을 거쳐 세심정까지 내려오는 길은 울긋불긋한 단풍이 온통 하늘을 가려 터널을 이루는 호젓한 산길이다.
언젠가의 여름여행 때 이 길을 내려오다가 이 근처 암자의 어느 비구승과 불공드리러 온 보살님이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속세의 때를 벗고 불심이 깊을 대로 깊었을 만한 그 승려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산 속이라고 경계심도 없이 남녀간의 진한 러브신을 열렬히 나누다가 전혀 예고치 못하고 출현한 필자를 보자 너무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람에 필자도 따라서 놀랍고 민망스러워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
남과 여, 음과 양의 화합이라는 원초적인 자연의 이치를 종교의 힘만으로는 과연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
세심정에서 법주사를 거쳐 오리숲 초입까지는 적송림으로 뒤덮인 평탄하고 상쾌한 길이다.
속리산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계절은 언제쯤일까.
가을의 단풍길도 좋고 겨울의 눈길을 걷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 계절은 여름 장마비를 맞으며 이 숲길을 걷는 것이다.
거기에다 팬플루트로 연주된 '여름비'라는 연주음악을 들으면서 가볼 일이다.
그 쉰 듯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호소력 짙은 악기의 소리와 비 맞으며 걷는 나그네와 주변의 분위기가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 한없는 명상에 잠겨들게 한다.
몇 년 전 들은 얘기가 있다.
어느 법학도가 사법고시 공부를 위해 깊은 산 속 암자에 칩거하며 법전과 씨름하고 있었단다.
어느 날, 여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데 머리도 식힐 겸 암자 툇마루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무심코 들으며 소나기 내리는 산야를 멍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단다.
그때 마침, '여름비'라는 연주음악이 흘러나오고 팬플루트의 애잔한 음과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가슴 절절하게 와 닿았다고 한다.
법학도는 그 악기의 소리에 도취된 나머지 악기에 대한 관심의 도가 깊어지고 드디어는 자신이 직접 국산팬플루트를 제작하기 위해 그 소재가 되는 갈대 비슷한 대나무를 찾아 전국의 산야를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한 곡의 음악과 더불어 자연이 주는 감동이 한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만수동이라는 천하의 복지가 속리산 자락에 숨어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듯, 속리산과 그 주변은 온갖 번뇌와 상념에서 벗어나 고요한 자신의 본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때묻지 않은 자연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Dr.오순영 글) ‘부스트(boost)’라는 단어 대한 소고 (0) | 2021.12.24 |
|---|---|
| (Dr. 오순영) 저는 지금 우리나라가 어떤 세계적인 세력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 같은 비통한 심정입니다. (0) | 2021.12.24 |
| (Dr. 오순영 ) 대한의협 자율정화특별위원회 성명서에 대한 우리의 입장. (0) | 2021.12.24 |
| 벤야민의 산책과 소로의 산책, 그 아름다운 차이 《걷기는 사유를 위한 최고의 도구》 (0) | 2021.11.27 |
| 작은 그릇은 빨리 넘친다. (0) | 2021.11.18 |